[설왕설래] 권진규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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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세계일보
ㆍ작성일	2004-11-3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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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1278

[설왕설래] 권진규 미술관

조각가 권진규(權鎭圭)가 ‘인생은 공(空), 파멸’이란 짧은 유서를 남기고 삼선교의 작업실에서 목을 맨 것은 1973년, 우리나라에서 아파트 건축 붐을 타고 미술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직전이다. 질병과 외로움,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과묵하고 예민한 천재 조각가는 그렇게 삶을 포기했다.

일본 무사시노 미술학교 재학 중 이과회전(二科會展)에 출품, 최고상을 받아 이목을 끌었던 그의 천재성은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의 3대 거장(巨匠)으로 손꼽힐 만하다.

사후에 작품값이 수억원대에 이르렀지만 정작 본인들은 끼니 걱정을 하며 작가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 사투를 벌인 점도 비슷하다.
‘비운의 작가’ 권진규는 일본인 오기노 도모와 열애에 빠졌지만 처가에서 귀화를 요구하는 바람에 결혼에 이르지 못했고 한국에 돌아와 오로지 작업에만 매달렸다. 경기도 여주의 찰흙을 퍼다 만든 그의 토조(土彫)는 한결같이 소박, 간결하고 그의 내면의 침묵과 비애를 머금은 듯한 조형물들이다.

그가 3년만 더 살았다면, 아파트 시대를 맞아 수요가 폭발한 미술시장 덕에 생활고를 면했을 것이다. 대형빌딩에 조각작품 설치가 법으로 의무화된 86년 이후까지 버텼다면 ‘원로작가’에다 재능도 뛰어나 ‘재벌작가’가 됐겠지만 그는 한창 작업할 50대초에 생을 접었다.

최근 그의 여동생 권경숙(77)씨가 오빠의 작품 130여점을 기증, 각계의 도움으로 여주에 ‘권진규미술관’을 설립한다고 한다.
브론즈나 석조 비용도 없어 테라코타를 많이 했던 초기 조각가들의 작품이 거의 멸실된 것을 생각하면, 깨지기 쉬운 테라코타 작품을 수십년간 팔지 않고 그처럼 많이 보존, 기증한 권씨의 정성과 높은 정신력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서귀포의 이중섭미술관에 못지않은 여주의 지역 명소가 될 것을 기대한다.

세계일보 2004-11-26 20:06, 차미례 논설위원